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네덜란드와 영국 등 인구도 적은 나라가 패권을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신뢰'를 얻어 국민들로부터 낮은 금리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데 있다. 자신이 보유한 청구권이 안전하다고 느끼면 낮은 금리라도 상관없다. 리스크가 높은 회사채의 금리는 높은 반면, 신뢰성이 높은 국채의 금리는 낮은 것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18세기 프랑스와 스페인 정부가 발행한 채권 금리가 높았던 이유는 신용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결국 영국은 스페인보다 군대는 약했지만 금융업을 발전시키고, 영란은행이라는 중앙은행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에 좋은 투자처로 성장할 수 있었다.
대항해시대로 열린 '글로벌 경제'
중국은 북로남왜라는 고통을 받다가, 일조편법이라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후 은화부족사태를 겪자, 스페인의 대규모 선대가 도자기나 비단 구입의 대금으로 은화를 지불함으로써 중국의 귀금속 부족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경기순환은 한나라 때 정점을 도달한 후,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동안 긴 침체기를 겪다가 당나라와 송나라 때 다시 발전을 이룩했다. 이때 중국은 서양에 비해 발달된 기술력을 이용해 비단, 차, 도자기에 우위를 점하며 서양으로부터 귀금속 유입을 끌어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가 시작되고, 일조편법 시행와 연이은 귀급속 공급확대 덕분에 명나라의 재정은 윤택해졌지만, 17세기에 접어들어 청나라에게 힘없이 무너졌다. 그 이유는 대규모의 농민반란 때문인데 명나라 황제들이 제대로 된 정책을 펼치지 못한 것이 방아쇠가 되었다. 그러나 '기후 변화'가 명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명나라 말기에 발생한 가뭄은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 명나라 황제의 재정낭비와 이민족의 침입, 역참제의 붕괴가 이를 더 가속화하였다. 쳥나라에 접어들어 만주족은 과거제도의 부활, 세금제도의 개혁을 단행한 강희제의 등장으로 태평성대를 이룩한다. 인두세폐지로 행정통계에 포착된 인구의 수가 증가하게 되면서 청나라의 인구는 4억을 돌파하게 된다. 인구의 증가는 토양의 황폐화, 임금의 하락이라는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맬서스와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
19세기 일본과 중국은 값싼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해 경제의 외형을 키우는 전략인 근면혁명이 일어났다. 그에 비해 영국은 사람의 노동력을 줄이고 기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의 인구압이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양에 비해 낮았던 이유는 유럽에서 주로 재배되던 작물인 밀의 생산성이 동양의 쌀에 비해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에서 경제력과 군사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은 청나라의 무역 제한의 대항으로 아편을 중국에 유입하기 시작했다. 청은 아편중독으로 인한 폐해로 인해 아편 수입을 규제하기 시작했고 이를 빌미로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영국은 중국과의 요역에서 발생하던 무역역조를 '아편 판매'로 해결함으로써 산업혁명을 추진할 자본력을 갖추게 된 셈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노예제도 폐지에 강력하게 저항한 이유는 남부가 북부에 비해 노예 농장의 생산성이 더 높았는데 노예를 매우 효율적으로 배분했고 노예 개개인의 생산성이 꽤 높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북부는 남부와는 달리 사람들의 창의력을 자극함으로써 혁신을 지속시키는 이른바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북부는 제조업, 수송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유하여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과 선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의 황금기 이야기를 통해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는 나라, 다시 말해 생산성 주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나라가 투자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공황! 아 대공황!
스페인, 중국사례에서 화폐공급이 줄어들 때 심각한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929년 대공황의 출발점은 주가 폭락 사태로 시작되었다. 그 이전까지 주가가 너무 많이 올랐으나 그 이면에 위험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레버리지 투자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레버리지 투자가 늘어난 상황에서 시장금리가 오르면서 대출 이자율의 상승이 투자 수익의 악화로 연결되었고 주식투자가 매력을 잃으면서 주식이 매각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때 뉴욕 연준은 왜 금리를 공격적으로 인상하였을까? 그 이유는 금본위제 때문이다. 대공황이전 금리인하와 통화공급 확대로 미국 증시에 거품이 형성되자 연준 이사회는 자금공급을 중단하고 이자율을 인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정책은 더 큰 부작용을 낳았다. 금본위제를 유지하고 있어 국가 간 환율이 고정되어 있는 상황이기에 한 나라가 금리를 인상하면 자금유입이 발생하기 대문이다. 그당시 연준은 청산주의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다. 결국 수많은 투자자들의 큰 손실이 주식 투자 자금을 대출해준 금융기관들의 위기로 번졌고, 은행들의 위기가 대공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당시 미 연준은 은행의 파산을 방치했는데 그 명분역시 금본위제였다. 연준이 은행들을 돕기 위해 긴급 대출을 해주어 금리가 떨어지면, 외국인이 금을 인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부각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긴축정책은 미국 경제를 더 어려운 지경으로 빠지게 만들었고 대대적인 대출감소가 발생했다. 미국이 이런 장기적인 불황에 빠진 동안 독일은 금본위제를 빠르게 포기하고 재할인율의 인하,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실업률을 떨어뜨렸다. 이는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더라도 공격적인 금리인하 및 적극적인 재정확대가 시행되면 악순환을 탈출하고 강력한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실증사례가 되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미 연준이 즉각적인 대응으로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한 것도 이때문이다. 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내리고, 시장에서 채권을 직접 매입하여 금리를 낮추고 통화를 공급하였다.
금본위제가 무너진 이후의 세상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세계경제는 호황을 누렸는데 미국의 압도적인 경쟁력이 서서히 약화되고 독일과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이 달러를 비축하면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71년 미국은 금본위제를 포기하였는데 이를 '닉슨쇼크'라고 부르며 금과 달러의 교환은 정지되었다. 1930년 대공황시기, 대부분의 나라가 금본위제를 폐지하면서 금가격이 급등하였고, 1971년 닉슨쇼크 이후 다시 한번 금본위제가 폐지되면서 금가격은 급등하였다. 하지만 금본위제 폐지 후 경기의 변동성은 줄어들었고, 인플레를 대가로 세계경제는 경기안정의 이익을 취하게 되었다. 미국 소비자 물가 흐름을 살펴보면 1971년 직슨 쇼크 이후 달러에 대한 신뢰 약화, 중동전쟁을 계기로 1차 석유파동으로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10%대를 돌파했고 1980년 2차 석유파동으로 15%까지 급등했지만 공격적인 금리인상으로 인플레가 꺾이면서 장기적인 물가 안정의 시기가 열렸다. 국제 유가는 미국의 실질 정책금리와 반대로 움직였는데 실질금리가 인상되면 달러 자산에 대한 선호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달러 가치 상승에 대한 기대가 높아질 때, 상품을 비롯한 비달러 자산에 대한 투자매력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닉슨쇼크 이후 불안했던 달러의 위상이 굳건해지면서 원유나 금처럼 변동성이 큰 위험자산에 투자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유가 상승에 발맞춰 지속적으로 원유 소비량은 줄어들었는데 유가 상승을 계기로 언유 소비자체가 줄어든 데다, 연비가 좋은 자동차의 비중이 높아지는 등 소비의 패턴이 바뀌면서 1980년대 초반 이후 20년에 걸쳐 저유가의 흐름이 이어지게 되었다.
일본 경제는 어떻게 무너졌나?
미국은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독일,일본,영국과 함께 플라자 합의를 하였다. 이들 중앙은행은 달러 가치 하락을 위한 강력한 시장 개입과 정책금리 조정을 통해 달러화 가치를 떨어트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달러에 대한 엔화 환율이 급락하면서 엔고 불황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일본 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2.5%까지 인하했지만 자산시장의 버블을 유발하고 말았다. 엔고로 수출경쟁력이 약화되었기에 일본기업들이 수출보다는 부동산 등 위락시설 투자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주식시장이 붕괴된 블랙먼데이 직전 일본 중앙은행은 엔고 불황에 대한 우려가 진정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금리 인상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블랙먼데이로 인한 국제 공조에 동참하느라 금리인상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고,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주식 버블이 출현했다. 또한 플라자 합의 이후 저금리 환경에서 발생한 일본 부동산 시장의 엄청난 버블은 일본 중앙은행이 금리를 6%까지 인상하자 무너지게 되었다. 자산의 가치가 무너지면서 소비심리도 위축하게 되었고 내수 위주의 경제인 일본은 장기적인 디플레이션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디플레이션은 통화정책이 무력화되기 때문에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상황에서는 금리를 아무리 낮춰도 실질금리가 더이상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극복하기가 어렵다. 일본 중앙은행이 버블붕괴가 시작한 지 1년 반이 되어서야 정책금리를 인하한 것에도 이유가 있다. 일본은 디플레이션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1929년 미 연준의 청산주의를 답습하게 되었고 1991~1992년 일본 경제가 경기 확장국면에 있다고 오판하였다. 결국 뒤늦게 경기불황을 인정했지만 만성적인 디플레 및 산업생산 감소라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1997년 우리나라는 왜?
많은 나라들이 빈곤의 악순환에 시달리는 이유 중 첫번째는 낮은 임금때문이다. 임금이 생존을 간신히 유지하는 수준으로 떨어진 나라는 산업혁명을 일으킬 동기 및 자본이 존재할 수 없다. 생존수준의 소득과 지주의 고리대금업이 결합되면 사회 전반의 교육수준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역시 낮은 임금과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토지 소유 분포, 저학력이라는 삼중고를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토지개혁을 실행하여 소유주가 경작하지 않는 모든 토지를 재분배하였다. 토지개혁이 이뤄지면서 농업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되었고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농업생산의 증가가 한계에 부딪힐 때 제조업을 통해 추가적인 성장의 돌파구를 열었다. 수출주도경제성장과 더불어 1960년대부터 시작된 베트남 전쟁과 물류혁명으로 동아시아에 거대한 시장이 생기면서 우리나라 수출은 빠르게 증가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가 벌어진 것은 금융시장을 개방하면서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한 것이 큰 패착이었다. 1995년 전후로 수출주도로 성장했던 우리나라 경상수지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금리를 떨어뜨리는 등 완화적 통화정책을 사용하면서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고갈되었다. 우리정부가 그 전에 금리를 인상하는 긴축정책을 시행하고 자유변동환율제도를 이행했더라면 구제금융을 신청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경기 변동폭은 이전에 비해 완만해졌고 자유변동환율제도의 채택과 금리자유화로 자금의 효율적인 분배, 경영의 건전화, 대규모 기업집단의 파산이 줄어들었다. 경제 전체의 이자율도 낮아졌는데 이는 사회전체의 투명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방증한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만성적인 경상수지 흑자는 저축보다 투자가 적다는 것을 의미하고 고용의 위축을 의미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수경기의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재정정책 확대가 필요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적인 세계경제의 흐름과 우리나라의 외환위기까지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조망하여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그래프를 통해 사건들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서 이해하기도 수월하였다. 미래는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는 없지만 과거 돈의 흐름을 본다면 그 속에서 어떻게 대책을 세우고 행동해야 하는지 조금은 통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경제도 복잡계이기 때문에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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